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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의 위치와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많은 소개가 있어 왔다. 그래서인지 억불숭유정책으로 피폐함을 면하지
못하던 조선시대의 불교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서산대사를 꼽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이 분이야말로 한국 불교의
정통을 이은 분으로 치고 있다. 그는 한국 불교의 특성인 십대방 (전남 남원지방) 오수 출신으로 속명은 김씨이고
명 가정 22년(서기 1543)에 태어났다. 그가 처음 출가한 것은 두류산(지리산)신명스님 밑에서였다. 앞의 기록이
설명하듯 그는 부용 영관의 법맥을 이었고 법을 얻은 이후 그는 당대의 문장가이던 상국 노수신의 가장서를 7년여에
걸쳐 모두 통람하는 등 유교에 대한 소양도 깊게 했다. 특히 그의 필적은 탁월하였다고 한다. 명성이 세상에 드날리자
송운 사명대사와 부휴를 흔히 이웅이라 불렀다.

광해군 원년(서기 1609)에 송광사에서 부휴를 청하자 암을 위시한 4백여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송광사에 내려와 절을
중수하였다. 다음해에는 벽암학성과 함께 무고를 입기도 했으나 왕 자신이 그들의 풍모를 보고 오히려 하사품을 내려
그들을 위로하기까지 했다. 어느 때인가 봉인사에서 국재를 베풀 때 부휴를 청하니 주변 사람들이 그를 보려고 몰려
더 나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뛰어난 인품을 말하는 일화일 테지만 그에게는 항상 대중들이 따라
700여명이나 되었다.

72세의 만년에 이르자 부휴는 조계산 송광사에 주석하다가 칠불사로 옮겨 갔다. 그해(서기 1615) 7월 상족(수제자)
인 벽암 학성에게 법을 전하고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읊고 입적하였다.

七十三年遊幻海 73년간 환해를 노닐다
今朝脫殼返初源 오늘 아침에 이르러 껍질을 벗고 처음의 원천으로 돌아왔다
廓然空寂元無物 모든 것이 공적하여 원래는 아무것도 없었음을 확연히 깨달았네
何有菩提生死根 어찌 깨달음(보제)과 생사의 뿌리가 있을건가

광해군은 그를 추서하여 홍각증계라 하였다. 세수 73년, 법랍 57년이었고 그의 영골을 모아 송광사, 해인사, 칠불사,
백장사 네 곳에 탑을 세웠다.

부휴의 문하에서 벽암 학성, 취미 수초, 백곡 처능, 백암 성총, 무용 수연 등 수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부휴의 사상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로서 시문집 5권이 상족 벽암에 의해 편찬되어 오늘날까지「부휴당대사집」이란
서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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