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13일 월요일, 1대 국사이신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법맥을 이으신 2대 진각국사 혜심선사 추모법회가 송광사 산내 암자인 광원암에서 봉행되었다. 본사에서는 주지스님과 총무국장스님, 재무국장스님, 교무국장스님이 참석하셨다. 광원암 주지이신 현봉스님의 집전으로 추모재와 탑돌이 의식이 거행되었다.

.JPG)
.JPG)

.JPG)
.JPG)
진각국사 혜심
松廣寺 眞覺國師 圓照塔(2世)
眞覺國師는 字가 永乙, 號는 無衣子, 姓은 崔氏, 出身은 나주 和順縣이다. 그리고 그의 父名은 鄕貢進士를 역임한 琬이며, 母姓은 裵氏이다. 비문은 李奎報가 찬하였으며, 書者는 金孝印(?~1253년)이다. 혜심은 1178년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儒學에 열중하여 24세인 1201년 司馬試에 응시 합격하여 太學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를 숙부 집에 모시고 간병하면서 불경 공부에 열중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죽자 曹溪山 修禪社에 머물고 있었던 普照國師 知訥에게 나아간다. 그리고 혜심은 어머니의 齋를 올리고, 당시 조계산에서 수선사를 창설하여 禪風을 크게 진작시키고 있었던 보조국사 지눌을 스승으로 삼아 출가하였다.
본격적인 승려의 길로 들어서자 전국을 유람하며 수행에 전념하기도 하고, 보조국사 지눌이 머물고 있는 사찰을 찾아 법문을 묻고 들으면서 시봉한다. 희종 대에는 지눌이 혜심에게 修禪社의 寺主 자리를 물려주고 圭峯庵으로 물러가려 하였으나, 혜심은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수행에 전념한다. 결국 혜심은 1210년 지리산으로 은거한 2년 후 스승이었던 보조국사 지눌이 수선사에서 입적하고 국왕이 수선사의 寺主 자리를 계승하라는 명을 내리자 수선사로 돌아온다. 그리고 혜심은 『禪門拈頌』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진각국사 혜심이 수선사에 머물자 전국에서 수많은 학인들과 도속인들이 몰려들어 수선사가 너무 비좁아진다. 그러자 강종은 유사에게 명하여 수선사의 증축을 명하고, 중사를 보내 공사를 감독케 한다. 당시 수선사의 중건에 국왕을 비롯하여 중앙정부와 지방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졌음을 시사받을 수 있는 내용이다.
진각국사 혜심이 수선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 崔瑀가 두 아들인 萬宗과 萬全을 보내 혜심을 스승으로 삼아 출가토록 하기도 한다. 이것은 수선사가 무신정권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수선사는 이들로부터 비호나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혜심은 최충헌에 이어 실권을 장악한 최우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수선사는 선종 사찰 중에서 보조국사 지눌, 진각국사 혜심을 거치면서 서서히 중심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최우도 이러한 수선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수선사는 지방사회 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된다.
이후 혜심이 1233년 병이 들자 국왕은 御醫를 보내 진찰토록 한다. 그리고 다음해에 馬谷이 주석하고 있는 月燈寺로 거처를 옮긴다. 당시 혜심의 병이 호전되지 않자 간병과 요양 차 월등사로 거처를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혜심의 병은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6월 26일 월등사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설법을 한 다음 입적한다. 당시 혜심의 세수는 57세, 법랍은 32세였다. 승려로서는 젊은 나이에 입적한 것이다.
하여간 마곡을 비롯한 문도들은 6월 27일 월등사 북쪽 봉우리에서 다비한 후 유골을 수습하여 수선사로 옮긴다. 국왕은 혜심의 입적 부음을 듣고 震悼하며, ‘圓照’라 시호를 내리고 國師로 추증하였다고 한다. 수선사로 유골을 옮긴 후 다음해인 5월쯤에 가서야 부도를 세우게 된다. 이것은 유골이나 사리를 본사인 수선사로 옮긴 후 齋를 올렸거나 어떤 이유로 本葬이 연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의 추정으로는 당시 혜심은 불교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국왕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고 있었으며, 수많은 학인과 법제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중앙의 많은 권력층들로부터 비호와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혜심이 일찍 입적하지 않았다면 살아생전에 왕사나 국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 왕사나 국사로 책봉되는 나이는 왕족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60대나 70대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혜심은 1233년 11월 56세의 나이로 병이 들고, 다음해에 갑자기 입적한다. 또한 고승은 입적할 때 문도들을 모아놓고 게송을 남기거나 마지막 설법을 하고 입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혜심의 입적 당시 상황을 보면 혜심의 제자로 보이는 월등사 주지 마곡 등만이 입적을 보았다. 따라서 제자들도 스승의 입적을 미처 예견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혜심이 입적한 다음 날 곧바로 다비식을 거행하고 유골을 수습하여 本寺라고 할 수 있는 修禪社로 옮긴다. 이것은 문도들이 진각국사 혜심의 부도를 本寺라 할 수 있는 수선사에 건립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혜심의 장례식과 그 절차에 대한 준비가 소홀하여 장례기간이 길어졌고, 일단 국왕으로부터 국사의 시호를 받은 이후 유골과 사리를 봉안하는 부도 건립 공사가 시작되었을 것이고, 거기에 소요되는 시간으로 인하여 다음해인 1235년 5월에 가서야 부도가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