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에 가기 위해 비내리는 새벽에 딸과 같이 순천으로 출발했다.
템플에 참가하기 위해 두달 전 부터 딸과 시간을 맞춰놨기에 폭우는 우리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강한 바람과 비로 진입로에 나무가 쓰러져 있고, 계곡물은 불어 있어 고마운신 셔틀버스 기사님이 다리를 건너 주실 땐 살짝 긴장이 되었다.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인생의 방향을 잃고 헤매는 딸에게 난 해줄 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 생각난 것은 송광사 템플스테이!
30여년 만에 그때의 내 나이인 딸과 같이 참여했다.
젊었던 나, 많은 불교 서적과, 템플스테이가 , 젊었기에 더 불안했던 나 자신을 굳건하게 지켜줬던 기억.
가끔은 부모의 말보다 몇 배 효력을 발휘 했던 기억.
그 기억이라면 지금의 딸아이에게 좋은 격려가 될 거란 생각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온 몸이 비에 다 젖어 가며 도착한 송광사는 내가 알던 그 절이 아니였다. 새로 조성된 경내와 최현대식 숙소, 무엇 하나 불편 함이 없게 구비된 비상약 부터 깨끗한 해우소 ,꽤 길었던 휴식과, 맛있는 간식, 참선을 위한 준비 운동인 요가까지......
편안함과 재미를 넘어 변해 버린 수련회에 대한 낯설음 까지 느꼈다. 30년 전 수련회는 죽비로 맞아 가며 참선 했고 이런 좋은 샤워실이 웬말이냐......라는 꼰대 기질이 스멀스멀 올라 오기 까지 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사자루에 앉아,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참선을 시작하자, 변한 건 송광사가 아닌 나였다는 걸 깨달았다.
늘 맘 속으로 조용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품고 살자는 젊은 나는 온데 간데 없고,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더를 외치는 욕심 많은 중년의 모습과, 자식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진로 까지 만족 못하고 서로 갈등하는 엄마의 모습.
변한 건 나 였다.
한평생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사시며 우리에게 무엇하나 버릴것 없이 좋은 강의를 들려 주시는 스님들의 강의
너무 맛있는 공양 덕분에 저절로 식욕이 올라오지만 그 식욕을 누를 만큼 힘든 발우 공양
가부좌 20여분도 못되 다리가 마비되 저절로 나오는 신음 소리
졸음을 이기지 못해 반은 졸았던 새벽 예불과, 가슴속이 울렁이며 먹먹해지는 법고 소리
댓잎 소리를 들으며 걸었던 불일암 가는 길
송광사는 예전 그대로 였다.
4박5일의 묵언을 철저하게 지키진 못했지만, 딸아이는 다행히 시간표에 맞게 잘 따라 주었고, 상황에 맞게 하라는 부탁과 다르게 1080배 까지 무난히 마쳤다.
묵언을 하기에 몸으로 안아주었지만, 난 절 밖에 나가서도 딸아이에게 무엇을 배우고 느꼈냐고 물어 보지 않았다.
그 짧은 4박5일이 인생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나 언젠가는 그 푸르름 속에서 오롯이 나만 바라보며 지냈던 몸과 마음이 신호를 보낼 것이다.
그때 고마웠다고,
또 지치면 찾아 오라고...
시대가 변하면 절도 변해야 한다는 말씀, 유독 사람들은 사찰에 대한 잣대가 엄중하다는 박물관장님의 말씀도 이해가 되었다.
욕심을 내자면 딸아이가 내 나이가 되었을 때 나처럼 자식의 손을 잡고 수련회를 찾을 수 있도록 그 명맥이 오래토록 유지 되길 바래본다.
끝으로 사자루를 단숨에 요가 클래스로 만들어 지친 수련생의 자세를 잡아주시는 요가의 고수이신 지도 법사 정응 스님
언젠가 나한전에서 본 동자승 처럼 인상 좋으시고, 온 몸이 땀범벅이 되도록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수련생을 보살펴 주신 효상 스님
외모와 다르게 카리스마 끝판 왕 이신, 그러나 청수물이 더러울 때 살짝 웃어주시며 넘어가는 아량을 보여주신 석안스님
너무 감사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송광사는 여전히 푸르르고, 스님들은 늘 제자리에 계셨습니다.